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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AP통신,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탐사 보도

미 AP통신,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탐사 보도

- 피해자 증언과 정부 자료 근거로 구타, 강간, 노예노동 등 인권침해 사례 적시
- 형제복지원의 정치적 목적, 그리고 박인근 원장이 챙긴 부당이득 사례도 밝혀


형제복지원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그야말로 '최악'으로 기억될 인권침해 사건이다. 형제복지원은 박정희 정권 때 시작됐고, 뒤이은 전두환 정권이 거리 '정화'를 명분으로 부랑자, 고아 등을 수용하면서 번창하기 시작했다. 하사관 출신인 형제복지원 원장 박인근은 조직을 군대식으로 편성하고, 원생들에게 온갖 가혹 행위를 자행했다. 그 가혹 행위 수준은 너무나 충격적이어서 SBS <그것이 알고싶다> 같은 공중파 시사고발프로그램에서 자주 다뤄졌다.


미 AP통신은 형제복지원 피해자 인터뷰와 단독으로 입수한 수백 건의 정부 자료를 근거로 약 11장 분량의 탐사보도를 내놓았고, 영국 데일리메일은 18일 이를 받아 보도했다.


AP통신의 보도 내용은 그동안 한국 언론에서 다뤄진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새롭게 밝혀진 내용도 많다.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부랑자나 걸인, 고아는 물론 반정부 유인물을 소지한 대학생도 형제복지원 입소대상이라고 했다. 즉, 이 시설이 체제 반대자를 수용하려는 목적도 있었다는 의미다.


그리고 형제복지원이 대우 등과 같은 기업과 유착을 맺고 막대한 이익을 챙겼으나 원생들에게는 한 푼도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도 AP통신은 밝혀냈다. 


그동안 한국언론 보도는 형제복지원에서 자행된 인권침해에 중점을 뒀을 뿐, 박인근 원장이 챙긴 이익에 대해선 별반 주목을 하지 않아 왔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당대 권력이 비극의 씨앗을 뿌리고 은폐한 사건이기도 하다. 당시 울산지검 김용원 검사(현 변호사)는 이 사건을 처음 인지하고 수사를 펼쳤으나 상관이던 부장검사는 이를 축소했다. 그 사람이 바로 국회의장을 지낸 박희태였다. 사실 박희태는 정권의 뜻을 집행한 데 불과하다. 형제복지원 사건이 불거지던 당시 전두환 정권은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궁지에 몰렸고, 그래서 정권의 치부가 될 또 다른 사건인 형제복지원 사건이 부각되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AP통신 보도 역시 이 사건이 정권의 필요에 따라 은폐됐음을 폭로한다. 이런 맥락에서 AP통신 보도는 가톨릭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을 파헤친 <보스턴글로브>지의 탐사보도에 견줄 만하다.


뉴스프로는 AP통신 보도가 높은 가치가 있다는 판단 아래, 기사 전문을 번역한다.


번역 감수 : 임옥


기사 바로가기 ☞ http://dailym.ai/1SWGahA


뉴스프로 외신 번역 바로가기 : https://bit.ly/2GXXpkg



'Hell within Hell': Children raped daily for years, forced to pick maggots out of open wounds and watch inmates being tortured and stamped to death at 'evil' South Korean labour camp


‘지옥 속의 지옥’: 수년간 아동들이 매일 성폭행을 당하고, 상처에서 구더기를 골라내야 했고, 수용자들이 고문당하고 맞아 죽는 것을 봐야했던 '악마'같은 한국의 강제 노동수용소


• Brothers Home, in Busan, South Korea, had more than 20 factories at peak
• Ex inmates claim children were raped and many prisoners beaten to death
• Thousands 'rounded up off the streets ahead of the 1988 Seoul Olympics'
• Busan city officials said facts are difficult to confirm now because facility closed 30 years ago


• 한국 부산 형제복지원, 전성기 때 20개 넘는 공장 소유
• 전 원생들, 빈번한 아동 성폭행, 다수의 수용자들 맞아 죽었다 주장
•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앞두고 수천 명 거리에서 잡혀가
• 부산시 관계자, 형제복지원 30년 전 문 닫아 사실 확인 어렵다 전해


By Associated Press
Published: 12:06 GMT, 18 April 2016 | Updated: 12:50 GMT, 18 April 2016



검정색 교복을 입은 14세 소년은 빵 한 조각을 훔쳤다고 경찰관이 추궁하는 내내 심장이 쿵쾅거려 신발만 쳐다보고 있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최승우 씨는 그 이후에 일어난 모든 일들을 이야기하며 눈물을 흘린다.


The policeman yanked down the boy's pants and sparked a cigarette lighter near Choi's genitals until he confessed to a crime he didn't commit.


경찰관은 소년의 바지를 잡아내리고 생식기 가까이에 라이터 불을 켜서 최 씨가 저지르지도 않은 범죄를 자백하게 했다.


Then two men with clubs came and dragged Choi off to the Brothers Home, a mountainside institution where some of the worst human rights atrocities in modern South Korean history took place.


그런 다음 곤봉을 든 두 남자가 와서, 현대 한국사에서 최악의 인권 유린이 행해진 산비탈의 수용시설, 형제복지원으로 최 씨를 끌어갔다.



Nobody has been held accountable to date for the rapes and killings at the Brothers compound (pictured) in Busan, South Korea, an investigation has claimed. Children are pictured at the camp

한국 부산 형제복지원 시설 내(사진)에서 일어난 성폭행 및 살인에 대해, 수사가 요청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날까지 아무도 책임을 진 적이 없다. 형제복지원에 있는 사진 속 어린이들.


A guard in Choi's dormitory raped him that night in 1982 - and the next, and the next. So began five hellish years of slave labour and near-daily assaults, years in which Choi saw men and women beaten to death, their bodies carted away like garbage.


1982년 그날 밤, 최 씨는 기숙사에서 한 직원으로부터 성폭행을 당했다. 그리고 이후 다시, 그리고 또 다시 그렇게 당했다. 그렇게 해서 노예 노동과 거의 매일의 폭행에 시달렸던 지옥같은 5년의 세월이 시작됐고 최 씨는 폭행으로 사망하는 남녀와 쓰레기처럼 버려지는 그들의 시체를 보았다.


Choi was one of thousands - the homeless, the drunk, but mostly children and the disabled - rounded up off the streets ahead of the 1988 Seoul Olympics, which the ruling dictators saw as international validation of South Korea's arrival as a modern country.


최 씨는, 당시 정권을 잡은 독재자들이 1988년 서울 올림픽을 한국이 현대적 국가로서 국제적 검증을 받게 될 기회로 보고 그 개최에 앞서 거리에서 치워버린 수천 명의 노숙자, 취객, 그러나 대부분 어린이와 장애인들 중 한 명이었다.


An Associated Press investigation shows that the abuse of these so-called vagrants at Brothers, the largest of dozens of such facilities, was much more vicious and widespread than previously known, based on hundreds of exclusive documents and dozens of interviews with officials and former inmates.


단독으로 입수한 수백 건의 문서들, 그리고 수용시설 관계자 및 전 수감자들과의 수십 차례 인터뷰에 근거한 AP통신의 조사는, 이와 비슷한 수십 개의 수용시설 중 최대 규모인 형제복지원에서 소위 부랑자에 대한 학대는 이전에 알려진 것보다 훨씬 더 잔학하고 광범위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Yet nobody has been held accountable to date for the rapes and killings at the Brothers compound because of a cover-up orchestrated at the highest levels of government, the AP found.


그러나 정부 최고위급에서 사건이 조직적으로 은폐되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아무도 형제복지원 수용시설 내의 성폭행과 살인에 대한 책임을 진 적이 없다.


Two early attempts to investigate were suppressed by senior officials who went on to thrive in high-profile jobs; one remains a senior adviser to the current ruling party. Products made using slave labour at Brothers were sent to Europe, Japan and possibly beyond, and the family that owned the institution continued to run welfare facilities and schools until just two years ago.


앞선 두 번의 수사 시도는 당시 정부 고위 관료들에 의해 좌절되었고 이들 관료들은 그 후 고위직으로 승승장구했으며, 한 명은 현 집권당의 상임고문으로 있다. 형제복지원에서 노예노역으로 만든 제품은 유럽과 일본, 그리고 아마 그 외 다른 나라들로 수출됐고 수용시설을 소유한 가족은 불과 2년 전까지 복지시설과 학교를 계속 운영했다.


Even as South Korea prepares for its second Olympics, in 2018, thousands of traumatized former inmates have still received no compensation, let alone public recognition or an apology. The few who now speak out want a new investigation.


대한민국 정부가 2018년 개최될 한국의 두 번째 올림픽을 준비하고 있는 아직까지도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수천 명의 전 원생들은 여전히 공개적 인정이나 사과는커녕 보상조차 받지 못했다. 지금 목소리를 내는 몇몇 피해자들은 새로운 수사를 원한다.



[중간 생략]



It finally closed its gates in 1988. In the 1990s, construction labourers dug up about 100 human bones on the patch of mountain just outside where it stood, according to one of the workers who found the bones, Lee Jin-seob.


1988년 형제복지원은 마침내 문을 닫았다. 1990년대에 건설 노동자들이 땅을 파다가 시설이 있던 곳에서 머지않은 산 쪽에서 100구가량의 시신을 찾았다고 시신들을 발견한 노동자 중 한 명인 이진섭 씨가 말했다.


Blankets covering the bones and the lack of burial mounds made Lee think they'd been buried informally and quickly. It's unclear what happened to the remains.


뼈가 담요에 싸여 있거나 봉분이 없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비공식적으로 재빨리 매장되었을 것이라고 이 씨는 생각했다. 시신 잔해를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On a recent trip to the site, which is now covered with tall apartment buildings, ex-inmates Choi and Lee Chae-sik stood on a concrete-covered former water reservoir that they think is the only remaining physical trace of Brothers. Both recalled the sight of guards carrying corpses into the woods.


지금은 높은 아파트가 들어선 그 현장을 최근 방문한 전 원생 최 씨와 이채식 씨가 형제복지원에서 유일하게 남은 흔적이라고 말하며 콘크리트로 덮인 예전 수조 위에 서 있다. 두 사람 모두 경비원들이 시신을 숲으로 나르는 것을 보았다고 회상했다.


'There could be hundreds of bodies still out there,' Lee said, pointing toward the steep slopes.


‘아직 저곳에 수백 구의 시신들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가파른 경사지를 가리키면서 이 씨는 말했다.


Inmates released from the facility ended up homeless and in shelters and mental institutions; many struggle with alcoholism, depression, rage, shame and poverty.


형제복지원에서 나온 원생들은 결국에는 집 없이 떠돌아다니거나 보호소와 정신병원에서 들어갔고, 많은 이들이 알코올중독과 우울증, 분노, 수치 및 빈곤과 싸우고 있다.


Choi, whose back is covered by a large tattoo from his time in a gang after he left Brothers, was imprisoned for assaulting a policeman.


형제복지원을 떠난 후 범죄조직에서 지내던 시절, 등에 큰 문신을 새긴 최 씨는 경찰관을 폭행한 혐의로 구속 수감됐다.


The few former inmates who have begun speaking out want justice: an apology and an admission that officials encouraged police to kidnap and lock away people who shouldn't have been confined.


목소리를 내어 말하기 시작한 몇 명의 제소자들은 정의를 원한다. 이들은 사과를 받고자 하며 정부 관료들이 경찰을 시켜 구금해서는 안 될 사람들을 납치하고 가두도록 부추긴 사실을 인정하기를 원한다.


'How can we ever forget the pain from the beatings, the dead bodies, the backbreaking labor, the fear ... all the bad memories,' Lee, who now manages a lakeside motel, said. 'It will haunt us until we die.'


현재는 호수가 근처에서 모텔을 관리하고 있는 이 씨는 ‘구타, 사체들, 뼈 빠지는 중노동, 공포…그 모든 나쁜 기억들로부터의 고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나?’며 ‘죽을 때까지 그 고통은 우리를 계속 괴롭힐 것이다’라고 말했다.


[번역 저작권자: 뉴스프로, 번역 기사 전문 혹은 일부를 인용하실 때에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십시오.]